거룩한 방해 (마르코 9: 30-37) - 9/23/201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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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방해 (마르코 9: 30-37) - 9/23/2018 #2

Postby markclc_admin » Mon Sep 24, 2018 10:09 pm

마르코 9: 30-37: SND

방해받는 것 좋아하시는 분?

마르코 복음. 가장 짧은 복음. 그런데 제 눈길을 끄는 다른 공관 복음의 병렬된 이야기보다 상대적으로 길게 서술된 스토리 3가지: 예) 지붕을 뚫고 중풍병자 친구를 예수님께 데려오는4명의 친구들. 그러나 친구에게 치유와 새로운 길 (마르코 2: 1-12). 마귀들린 사람을 치유하시는 예수님. 돼지 떼가 호수로 뛰어들어 모두 죽는 일. 이제 마귀들린 사람은 온전해짐 (마르코 5: 1-20). 딸이 죽어가기에 속이 타들어가는 야이로의 심정도 모르고 갈길 바쁜 예수님을 멈추게 하는 하혈하는 여인. (마르코5: 21-43). 이 3가지의 이야기의 공통점은 “妨害” 혹은 “거룩한 개입” 그리고 새로운 삶의 출현. 사람들이 예수님을 방해. 예수님이 사람을 방해 (개입). 사람이 예수님과 또 다른 사람을 방해.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는 방해를 통해서 개입을 통해서 오히려 새로운 길이 열리고 믿음의 배움이 일어남. 저도 수녀님들께서도 각자의 삶의 길에 방해를 받아본 적이 있음. 방해는 새로운 삶의 길을 우리에게 보여준 체험이 있지 않으신가요? 어쩌면 우리는 방해를 스스로 구하지는 않을 지라도 방해를 겪을 수 있어야 믿음의 길을 더 깊게 걸을 수 있는 것이라고 믿는다. 엠마오 이야기 (루카 24:13-49)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방해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전형. 듣고 싶은 것만을 원하는 사람들. 확증편향자 (Confirmation bias). 예수님의 죽임을 당하고 부활한다는 말씀에 더 이상 묻지 않고 (31-32)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도 하지 않음 (34). 방해받기를 거부하는 즉 성숙의 길을 거부하는 제자들. 예수님은 어린이를 통해서 “어이. 친구들 그건 네 말이다 ”라고 말씀을 하시는 듯… 왜 하필 어린이인가?



예수님은 죽음과 부활의 새로운 가르침을 거부하는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37)’라고 말씀. 이 말씀안에 우리 어른의 눈으로 볼 때 약하고 작기에 자신들의 존재를 우리에게 강요하지 못하는 어린이가 오히려 우리 삶의 근원을 하느님과 연결시키는 우리의 가치체계를 전복시키시는 무엇이 담겨있는 존재라는 말씀.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어린이처럼 자신의 뜻을 관철시킬만큼 힘이 없을 때, 상황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을 때, 아직 자신의 존재가 인정되지 않는 상태에 있을 때, 언제라도 자신의 약점이나 취약점이 위험에 노출 될 때는 바로 우리의 모습. 그런데 그때야말로 나와 하느님이 만나는 때라는 것이 아닐까? 내 삶이 내 희망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오해를 받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다른 말로 하면 나의 약점 취약성과 드러나는 순간. 그 순간을 외면하기보다는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보듬어야 한다는 말씀. 그때야 말로 내가 예수님과 하느님을 경험하는 순간이라는 것.



결론: 우리가 거룩한 방해를 받을 때 즉 나의 취약성과 약점을 어루만질 때 하느님이 바로 우리가 더욱 성숙한 신앙의 삶의 문을 여는 비밀번호를 해킹하시는 순간이 아닐까? 오늘도 거룩한 방해를 받을 준비가 되어있으신가요? 오늘도 예수님의 해킹을 당할 준비가 되어 있으신가요? <潛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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