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7:36-50: 예수님 접촉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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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 7:36-50: 예수님 접촉하기

Postby markclc_admin » Thu Jun 16, 2016 11:57 pm

인간의 어리석은 최초의 실수는 하느님께 등을 돌린 죄입니다. 그 죄로 우리는 하느님의 집에서 쫓겨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하신” (2 코린 5:18) 먼저 우리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미신 하느님 때문에 다시 하느님의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죄를 지었기에 하느님 집을 떠나왔으니 다시 집으로 돌아가 “하느님과 화해를 해야한다” (2 코린 5:20) 고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과의 화해가 그리 쉬운 것이 아니지요? 우리는 하느님과 왜 화해를 해야하는가하는 선언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누구나 다 이해합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느님과 화해를 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여인의 모습에서 세가지 점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1. 하느님과의 화해의 출발은 무엇보다 ‘내가 본질적으로 불완전한 존재임을 받아들이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되지 않나 합니다. 즉 나는 죄인이고 하느님집에서 멀어졌으니 구원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어두운 곳에서 머물지 않고 구원이 있는 곳으로 나오는 구체적인 행동을 의미합니다. 누구나 내가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지요.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창조물이지만 누구나 흠과 결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여인의 행동에서 보듯이 자신이 구원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은 자신을 쓸모없는 존재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하느님의 자비가 필요한 가능성의 사람임을 인정하는 깊은 신앙의 행위입니다. 무엇이 우리가 죄인이지만 죄를 인정하지 못하게 하는가요?

2. 예수님께 다가가는데 방해가 되는 것을 넘어서기: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는데 어려움을 겪는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우리의 모습입니다. 예수님 앞으로도 다가서지 못하고 그렇다고 복음의 다른 사람들처럼 도와달라고 외치지도 못하고 뒤쪽 먼발치에 서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쭈뼛쭈뼛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향유를 옥합에 담아와서 예수님의 발을 씻겨드리면서 예수님 “앞으로”나아갑니다. 여인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 순간 예수님께 다가가는데 방해물을 넘어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넘어서야 할 방해물은 스스로 죄인이라는 자존심의 상처,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길에 대한 부담감, 자신의 죄에 대한 부끄러움, 혹시나 바라사이 집에 들어가는 것을 거절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등등 이었을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예수님께 다가가지 못하게 하는 방해물은 무엇입니까?

3. 예수님 접촉하기: 용서는 자기의 죄에만 초점을 두는 것은 용서의 핵심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용서의 초점은 나의 죄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에 접촉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성이 예수님의 사랑과 만나는 곳에서 용서가 일어납니다. 복음에서 그 죄성과 사랑이 만나는 곳은 바로 가장 우리가 보기 싫어하는 "발"임을 기억합시다. 화해란 내 자신의 가장 낮은 곳, 관심이 없고 더럽게 보이는 곳을 관심을 두고 어루만질 때 가능한 일입니다. 그만큼 화해란 그만큼 어렵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응시해야합니다. 오늘 제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한 말이 바로 예수님과 접촉하라는 말씀입니다. (갈라티아 2:16)

결론: 여인안에서 일어난 이야기는 화해를 위해서 우리에게 예수님을 보내신 하느님의 사랑의 증언입니다. (2 코린 5: 18) 불완전하기에 주님의 자비가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고백한 우리에게 주님은 우리가 어느 특정한 죄 또는 불완전함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극복하였는가를 묻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은 우리에게‘너는 살아가면서 너의 불완전한 존재의 신비를 겸손하고 참을성있게 받아들였는가? 그 신비로 인해 자신 뿐만 아니라 이웃에게 더 인내하고 넉넉해지는 법을 배웠는가? 무엇보다도 화해가 우리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주님의 무한한 사랑을 신뢰할 때 오는 것임을 배웠는가? “를 물으실 것입니다. 자주 예수님과 접촉해야합니다. 나의 죄성에만 눈길을 둘 때 우리는 영원히 성장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 눈길을 둘 때 우리는 새로운 존재로 성장하게 갈 수 있습니다. 세례를 통해서 그 사랑을 경험한 우리는 더욱 더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자 “화해의 말씀을” 안고서 “그리스도의 사절”로 살아가는 은총을 청합니다. (2 코린 5: 17, 1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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