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8: 19-21: SND
질문: 오늘 복음에서 만나고 싶은 사람은?
1. 나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가족이 밖에 기다리고 있음을 알려준 그 이름 모를 “누구”를 만나고 싶다. (20)
2. 이유 1: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예수님과 기억을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 그러나 스스로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더 많을 듯… 오늘 복음에서는 “군중 때문에”라고 (19) 상징화되는 어떤 벽 혹은 이유 때문에: 고백성사를 해도 해도 벗어나지 못하는 죄의식. 과거에 사로잡힌 사람, 용기가 없는 사람. 상처받은 사람. 부끄러워하는 사람들, 스스로 난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서… 가장 안타까운 그룹이 예수님을 만날 수 없는 그 이유조차 모르는 사람들. 그들이 예수님과 가깝게 다가가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바로 이 “누구"이기 때문. 복음안의 “누구”가 어떻게 예수님의 벽 건너편에 있는 사람들의 원의를 알아차렸을까? 어떻게 예수님의 영역 밖에 있는 사람들을 예수님께 가는 길을 막는 방해물을 넘어서 이끌 수 있을까? 동시에 이 “누구씨 혹은 누구 부인”은 위협적이고 권위를 가지고 있는 존재를 대하는 태도보다 위협을 느끼지 않거나 공동체의 가장 주변부에 있는 존재를 대하는 방법이나 선택이 우리의 성숙함과 인격의 깊이를 드러내는 경우가 많은 것임을 다시 일러주기 때문.
3. 이유 2: 이름 모를 누구가 사도라고 불리지 않더라도 예수님의 제자라고 불리지 않더라도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고 있더라도 예수님께로 가는 물꼬를 터주는 사람. 이 누구씨가 2000년 후에 정강엽이라는 한국인이 그를 기억해주리라고 상상조차 하였겠는가? 저는 이 누구씨를 우리가 하는 사도직과 연결해서 생각. 사도직에 의미가 있는 것은 객관적으로 중요해서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그 사도직에 투신하고 충실하는가에 달려있음을 이 이름조차 Mr 혹은 Ms. 누구가 가르쳐주기 때문. 어떤 것도 그 자체로 하찮은 일이나 자리가 없음. 좋은 사도직은 앞에 분들이 만든 것. 내가 그것에 무임승차는 말기. 과연 내가 나에게 주어진 일에 성심을 다하는가? 예) “어떤 수녀님 사도직이 너무 힘들어서 왜 저에게 이런 사도직을 주셨습니까 하고 예수님께 한탄… 예수님 왈: 그 사도직에 지금 너의 구원이 있기 때문!” 우리가 익명으로 성심으로 하는 사도직이 나를 구원하고 이웃을 구원하는 것.
4. 결론: 오늘 예수님은 나의 삶이 하느님의 뜻을 얼마나 살아있는가에 따라서 예수님의 직계도 될 수 있고 방계도 될 수 있고 그냥 주변에서 쉽게 만나는 아재이거나 아줌마로 남을 수 있다는 말씀. 누구씨 대신에 나의 이름을 넣을 수 있을까? 예수님을 만나려는 사람들을 알아차리기. 그들의 원의를 읽어주기. 그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기. 우리도 예수님의 형제자매 될 수 있습니다. 아멘. <潛伸>
예수님과 가깝게 다가가도록 도와주는 사람 (9/24/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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