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3: 13-17: SND
마귀가 마르티노 성인을 시험해 보려고 임금처럼 화려하게 꾸미고 나타남. “마르티노,너의 충실함에 감사. 이제부터 너는 내가 늘 가까이 있다는 것을 체험할 터이니 나를 신뢰하여라.” 그러자 마르티노가 물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인가?” “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하고 마귀가 대답. 마르티노가,“그러면 당신의 상처(5상)는 어디 있는가?" 질문. 마귀는 자기가 천국의 영광중에 있으므로 거기는 상처같은 것은 없다”고 대답. 마르티노는 “상처가 없는 그리스도는 나는 모른다. 십자가의 표시가 없는 그리스도를 나는 신뢰할 수 없다” 하고 거절.
십자가는 예수님을 만나는 열쇠. 그런데 십자가를 웃음거리로 만든 경우: 굴러가는 십자가: 노무현 정권: 사립학교에 대한 노무현 정부의 비판적인 시각에서 촉발된 사학법 개정논의에 대해서 격론. 보수단체에서 서울 시청앞에 모여 데모를 하고 있었는데 어떤 분이 지고 있는 십자가의 끝에 “바퀴”가 …. 어떤 사물의 상징을 본질이 아닌 테크닉으로 살아가려는 모습이라서 매우 씁쓸했던 기억.
신학을 공부했지만 십자가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온전히 배제한 채 저 개인의 인간적 체험이 가르쳐준 십자가의 본질 몇 가지:
1. 십자가는 우리에게 가장 극심한 고통의 순간에도 가장 극심한 외로운 순간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하느님과 대화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십자가 상에서 예수님 대화하신다. 하느님과. 인간과….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마태오 27:46) 제가 좋아하는 단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 상처입고 못에 찔리는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하느님과 질문하고 대화를 하는 것. 우도와의 대화 (루카 23:42-43) 기도하는 것이 중요. 움추려들 때 내 골방에 처박히고 싶을 때 예수님의 고통을 닮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를 외면하는 것임을 가르침.
2. 십자가는 우리의 삶은 작가의 손길에 달려있음을 가르친다: 예수님 마지막 말씀이 수동 (passive)의 표현임에 주목: “다 이루어졌다” (요한 19:30) 다 이루었다가 아니라… 십자가 사건을 하느님이 작가라는 사실. 아무리 대단한 배우라고 하더라도 결국 그들의 연기는 감독이나 작가의 손길에 달려있음. 드라마 볼 때, 배우 쳐다보지 말라. 상황 결정은 작가가 하는 것이다. “하느님”이 결정한다. 하느님의 선한 결정을 믿으라. 내가 중심에 서고 싶을 때마다 십자가를 생각.
3. 십자가는 총량 불변의 법칙임을 가르친다: 십자가는 미룬다고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예레미야 28:1-17) 가짜 예언자 하난야는 예레미야의 “나무 멍에”를 꺽어 버린다. 하난야는 온 백성에게 장미빛 예언: ‘내가 두 해 안에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의 멍에를 모든 민족들의 목에서 벗기겠다” 그러나 하느님은 나무 멍에 대신에 쇠멍에를 모든 백성들에게 줌. 멋대로 십자가를 거부하거나 외면하는 것은 무익한 일. 나무 멍에 거부하다가 쇠멍에 지게 된 것. 내게 주신 십자가가 있다. 성실하게 지는 것이 맞음. “똥을 우아하게 누는 법은 없음”을 십자가에서 생각 (채준호 신부님)
4. 십자가는 우리가 세상의 아픔에 무관심하지 않도록 가르친다. 세상의 아픔에 동행하도록 가르친다. 예수님에게 무관심하지 않는 키레네 사람 시몬 (마르코 15:16-26). 십자가상에서 죽음에 임박해서도조차 슬픔에 빠진 성모님을 돌보시는 에수님: “이분이 네 어머니이시다.” (요한 19:27) 세상의 아픔에 무감각해질 때마다 십자가를 생각
결론: 수녀님들 각자의 체험에서 십자가의 본질은 무엇인가? 특히 우리가 수도자로서 신앙인으로서 예수님을 따르는데? 삶의 체험에서 우러나는 십자가의 본질을 탐색하는 하루이기를… 이해하고 십자가 지는 것은 아니라 믿고 지는 하루가 되기를….. <潛伸>
십자가는 예수님을 만나는 열쇠 (9/13/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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