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다 (11/6/2016)
Posted: Wed Nov 09, 2016 8:41 pm
루카 20:27-38: CJ
오늘 복음에서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부활과 관련된 곤란한 질문을 던진다. 이스라엘에서 우리가 오늘날 이해하는 부활신앙이 확립되기 전에는 죽은 사람은 후손이나 살아있는 사람들의 기억속에 계속 살아있을 것이라고 믿는 정도. 그렇지만 주변의 문화 종교와 접촉하면서 부활신앙이 확립. 따라서 후손이 없이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시동생이 과부가 된 형수와 다시 결혼을 하는 풍습이 있었다. 그런 풍습을 만든 이유는 1) 후손을 이어서 죽은 사람의 삶이 계속해서 후손에 전달되는 가문의 뿌리가 지속되는 것을 확보하는 것과 2) 남편이 없어서 자생적으로 생존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 과부를 사회적으로 보호하려는 의미가 있었고 3) 무엇보다도 이스라엘 메시아 사상과 관련이 있는데 후손들이 반드시 메시아를 보게하려는 의도에서 대를 끊으면 안된다는 믿음
그러나 예수님은 "저 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35) 라고 하시면서 부활은 현재의 삶과는 차원이 다른 사건이라는 것을 분명히 일러주신다.
차원이 다른 사람으로서의 부활로 인간은 더 이상 후손을 이으려는 즉 연속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형수와 함께 사는 것에서 보여지듯이 매우 어색하고 억지스러운 일을 할 필요가 없다. 또한 이제는 과부를 보호하려는 사회적인 장치를 할 필요가 없어진다. 하느님의 영원하신 사랑이 이제는 사람들을 보호할 것이다. 그리고 예수라는 메시아를 만난 것으로 이미 부활의 완성이 이루어진다. 이제는 부활로서 후손을 잇는 일이나 약자를 보호하는 일은 인간의 힘이나 계획이 아닌 하느님의 영역에 속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부활은 예수님의 이 세상속으로의 육화와 부활로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믿는다. 즉 부활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영역이 된 것이다.
그런데 부활은 정말 저 세상의 일 혹은 우리의 자리는 없는 것일까? 여러분은 영성대학 입학과 졸업을 통해서 더욱 일상 안에서 하느님의 삶을 살아가겠다고 결심하고 그 길로 초대를 받는다. 그런 결심으로 이 길을 걸어가시는 시간에 제가 조금이나마 함께 하는 것에 대해서 감사드리고 그 주님의 길에 응원을 보낸다. 그 길을 잘 걸어가시는 것이 교회를 다시 살리는 일이고 오늘날의 우리 사제와 수도자에게 경종을 울리는 것이고 여러분이 자신의 부활의 삶을 준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졸업과 입학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라고 하시면서 동시에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라고 선언하시는 예수님의 말씀과 연관이 되어 있다. 그 선언의 의미는 단순히 숨쉬고 사는 생존과는 거리가 있는 삶을 살아내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다" (38절)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큰 위안이 된다. 부활의 하느님은 현재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누구에게나 주어진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은 이제는 정적인 차원이 아니라 동적인 차원이라는 것이다. 신앙은 미래의 일이 아니라 현재의 일이다. 머리가 아니라 손과 발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부활은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예수님이 살아계시는 肉化의 또 다른 얼굴이다.
우리는 언제나 배운 것이 머릿속에서만 활동하지 안하도록 현실에서 살아내는 사람만이 진정한 의미의 자기 혁명을 이룰 수 있을 것. 영성대학의 경험을 통해서 "당신은 지금 삶에 대해, 하느님의 활동에 대해, 그리고 세상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의문부호를 던지고 있는가?" (니체: 우상의 황혼)라는 질문에 심각하게 답을 하시기를 바란다. 우리는 <생활>하여야지 그저 <생존>해서는 안된다. 그것이 "활동중의 관상"의 삶을 사시는 것이 아닐까? 마냥 생존하기 보다는 살아내는 것이 부활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소명을 무거운 짐으로 생각하지 말자. 자기를 존중하면서 하느님의 일을 보는것이 쉽지는 않지만 결국 진짜 '자기자신'이 되어야 아무도 모르는 그렇지만 하느님은 아시는 울림을 간직하며 살 수 있을 듯. 그런 자기 울림을 이 대학을 통해서 만들어보시기를 기도한다. <潛伸>
오늘 복음에서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부활과 관련된 곤란한 질문을 던진다. 이스라엘에서 우리가 오늘날 이해하는 부활신앙이 확립되기 전에는 죽은 사람은 후손이나 살아있는 사람들의 기억속에 계속 살아있을 것이라고 믿는 정도. 그렇지만 주변의 문화 종교와 접촉하면서 부활신앙이 확립. 따라서 후손이 없이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시동생이 과부가 된 형수와 다시 결혼을 하는 풍습이 있었다. 그런 풍습을 만든 이유는 1) 후손을 이어서 죽은 사람의 삶이 계속해서 후손에 전달되는 가문의 뿌리가 지속되는 것을 확보하는 것과 2) 남편이 없어서 자생적으로 생존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 과부를 사회적으로 보호하려는 의미가 있었고 3) 무엇보다도 이스라엘 메시아 사상과 관련이 있는데 후손들이 반드시 메시아를 보게하려는 의도에서 대를 끊으면 안된다는 믿음
그러나 예수님은 "저 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35) 라고 하시면서 부활은 현재의 삶과는 차원이 다른 사건이라는 것을 분명히 일러주신다.
차원이 다른 사람으로서의 부활로 인간은 더 이상 후손을 이으려는 즉 연속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형수와 함께 사는 것에서 보여지듯이 매우 어색하고 억지스러운 일을 할 필요가 없다. 또한 이제는 과부를 보호하려는 사회적인 장치를 할 필요가 없어진다. 하느님의 영원하신 사랑이 이제는 사람들을 보호할 것이다. 그리고 예수라는 메시아를 만난 것으로 이미 부활의 완성이 이루어진다. 이제는 부활로서 후손을 잇는 일이나 약자를 보호하는 일은 인간의 힘이나 계획이 아닌 하느님의 영역에 속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부활은 예수님의 이 세상속으로의 육화와 부활로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믿는다. 즉 부활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영역이 된 것이다.
그런데 부활은 정말 저 세상의 일 혹은 우리의 자리는 없는 것일까? 여러분은 영성대학 입학과 졸업을 통해서 더욱 일상 안에서 하느님의 삶을 살아가겠다고 결심하고 그 길로 초대를 받는다. 그런 결심으로 이 길을 걸어가시는 시간에 제가 조금이나마 함께 하는 것에 대해서 감사드리고 그 주님의 길에 응원을 보낸다. 그 길을 잘 걸어가시는 것이 교회를 다시 살리는 일이고 오늘날의 우리 사제와 수도자에게 경종을 울리는 것이고 여러분이 자신의 부활의 삶을 준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졸업과 입학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라고 하시면서 동시에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라고 선언하시는 예수님의 말씀과 연관이 되어 있다. 그 선언의 의미는 단순히 숨쉬고 사는 생존과는 거리가 있는 삶을 살아내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다" (38절)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큰 위안이 된다. 부활의 하느님은 현재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누구에게나 주어진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은 이제는 정적인 차원이 아니라 동적인 차원이라는 것이다. 신앙은 미래의 일이 아니라 현재의 일이다. 머리가 아니라 손과 발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부활은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예수님이 살아계시는 肉化의 또 다른 얼굴이다.
우리는 언제나 배운 것이 머릿속에서만 활동하지 안하도록 현실에서 살아내는 사람만이 진정한 의미의 자기 혁명을 이룰 수 있을 것. 영성대학의 경험을 통해서 "당신은 지금 삶에 대해, 하느님의 활동에 대해, 그리고 세상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의문부호를 던지고 있는가?" (니체: 우상의 황혼)라는 질문에 심각하게 답을 하시기를 바란다. 우리는 <생활>하여야지 그저 <생존>해서는 안된다. 그것이 "활동중의 관상"의 삶을 사시는 것이 아닐까? 마냥 생존하기 보다는 살아내는 것이 부활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소명을 무거운 짐으로 생각하지 말자. 자기를 존중하면서 하느님의 일을 보는것이 쉽지는 않지만 결국 진짜 '자기자신'이 되어야 아무도 모르는 그렇지만 하느님은 아시는 울림을 간직하며 살 수 있을 듯. 그런 자기 울림을 이 대학을 통해서 만들어보시기를 기도한다. <潛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