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11/8/2016)
Posted: Wed Nov 09, 2016 8:51 pm
요한 2:13-22: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SND
약간의 역사적 설명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 라테란 궁전을 로마 주교 즉 교황에게 기증. 324년에 라테란 대성전이 로마의 첫 성당으로서 공식적으로 봉헌. 왜 이날을 기념하는가? 공인됨으로써 박해가 끝나고 새롭게 형성된 교회의 모습. 쫓겨다니지 않고 지하에 숨지않고서도 평화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집이 생겼으니 감사한 일이고 기념할 일. 말 그대로 로마에서의 처음으로 마련한 집에서의 첫 집들이 하는 날.
이 역사적 배경과 복음에 비추어 우리는 어떤 질문을 받게 되는가? 2 가지 질문
1. 로마의 주교좌 성당, 즉 cathedral은 베드로 성당이 아니라 라테란 성당이라는 사실에서 시작. 주교좌란 말 그대로 “주교님의 의자 (cathedra)”가 있는 성당을 말하며 그 성당은 그 교구의 중심이 되고 교구신자들이 가르침을 얻는 성당을 의미. 특히 이 라테란 성당은 성전의 정면에 “로마와 전세계의 가장 거룩한 어머니 성당”이라는 글. 즉 전 세계 가톨릭 교회의 어머니 교회라는 명칭. 가톨릭교회의 가장 중심성당이라는 의미.
오늘 라테란 대성당 봉헌을 기념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질문. 즉 나의 삶의 중심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어디에서 나의 삶의 질문에 대한 가르침을 얻는가? 우리 세상과 삶의 중심이 어느 분께 있어야하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마음과는 달리 내가 아닌 남의 의견 말 행동에 춤추지는 않는가? 연극배우처럼 남의 눈에 어떻게 보이는가에 마음을 뗄 수 없는 performance 즉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살아가는 공연하는 삶을 살지는 않는가? 그래서 관객의 갈채의 크기에 따라 내 삶의 크기조차도 제단하면서 살아가지는 않는가? 예수님이 삶의 중심점에 계시지 않다는 증거. 우리는 어디에 가더라도 나의 삶의 중심조차 장소에 따라 옮겨살아가는 유목민 신앙생활을 하지는 않는가?
2. 그 질문은 동시에 정말 나의 중심의 아닌 것을 허물 수 있는가? 쫒아낼 수 있는 가? 뒤엎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가져온다. 오늘 복음은 화를 내는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인간 예수를 보여주는 복음의 예로 자주 보여진다. 그렇지만 복음은 인간 예수의 모습을 보여주기 보다는 우리의 삶의 본질이 아닌 것을 몰아내고 뒤엎는 모습의 예수님이다. 그렇게 그분은 본질이 아닌 것을 뒤엎고 새롭게 하신다. 우리는 과연 그렇게 할 수 있는가?
결론: 이 가지 질문 즉 1) 나의 삶의 중심은 어디인가? 2) 나의 중심이 아닌 것을 해체할 수 있는가? 교회가 오늘 기념하는 라테란 대성전 봉헌일의 의미를 나의 삶과 연관시켜 생각해본 2가지 질문. <潛伸>
약간의 역사적 설명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 라테란 궁전을 로마 주교 즉 교황에게 기증. 324년에 라테란 대성전이 로마의 첫 성당으로서 공식적으로 봉헌. 왜 이날을 기념하는가? 공인됨으로써 박해가 끝나고 새롭게 형성된 교회의 모습. 쫓겨다니지 않고 지하에 숨지않고서도 평화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집이 생겼으니 감사한 일이고 기념할 일. 말 그대로 로마에서의 처음으로 마련한 집에서의 첫 집들이 하는 날.
이 역사적 배경과 복음에 비추어 우리는 어떤 질문을 받게 되는가? 2 가지 질문
1. 로마의 주교좌 성당, 즉 cathedral은 베드로 성당이 아니라 라테란 성당이라는 사실에서 시작. 주교좌란 말 그대로 “주교님의 의자 (cathedra)”가 있는 성당을 말하며 그 성당은 그 교구의 중심이 되고 교구신자들이 가르침을 얻는 성당을 의미. 특히 이 라테란 성당은 성전의 정면에 “로마와 전세계의 가장 거룩한 어머니 성당”이라는 글. 즉 전 세계 가톨릭 교회의 어머니 교회라는 명칭. 가톨릭교회의 가장 중심성당이라는 의미.
오늘 라테란 대성당 봉헌을 기념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질문. 즉 나의 삶의 중심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어디에서 나의 삶의 질문에 대한 가르침을 얻는가? 우리 세상과 삶의 중심이 어느 분께 있어야하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마음과는 달리 내가 아닌 남의 의견 말 행동에 춤추지는 않는가? 연극배우처럼 남의 눈에 어떻게 보이는가에 마음을 뗄 수 없는 performance 즉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살아가는 공연하는 삶을 살지는 않는가? 그래서 관객의 갈채의 크기에 따라 내 삶의 크기조차도 제단하면서 살아가지는 않는가? 예수님이 삶의 중심점에 계시지 않다는 증거. 우리는 어디에 가더라도 나의 삶의 중심조차 장소에 따라 옮겨살아가는 유목민 신앙생활을 하지는 않는가?
2. 그 질문은 동시에 정말 나의 중심의 아닌 것을 허물 수 있는가? 쫒아낼 수 있는 가? 뒤엎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가져온다. 오늘 복음은 화를 내는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인간 예수를 보여주는 복음의 예로 자주 보여진다. 그렇지만 복음은 인간 예수의 모습을 보여주기 보다는 우리의 삶의 본질이 아닌 것을 몰아내고 뒤엎는 모습의 예수님이다. 그렇게 그분은 본질이 아닌 것을 뒤엎고 새롭게 하신다. 우리는 과연 그렇게 할 수 있는가?
결론: 이 가지 질문 즉 1) 나의 삶의 중심은 어디인가? 2) 나의 중심이 아닌 것을 해체할 수 있는가? 교회가 오늘 기념하는 라테란 대성전 봉헌일의 의미를 나의 삶과 연관시켜 생각해본 2가지 질문. <潛伸>